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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수들/장편소설/최성배(이든북)

월송리 2025. 12. 21. 11:12

해발 228m의 바위산은 사막을 지키는 피라미드처럼 우뚝 서 있었다. 바다에서 솟아난 기암괴석들은 자연이 만든 벽돌처럼 산을 쌓았다. 융기된 산꼭대기의 일등 바위와 허리에 걸쳐져 낟가리처럼 생긴 노적봉이 종착역의 철로를 내려다보았다. 수평선과 산꼭대기는 둔각을 이루어 저물녘에는 온통 벌겋게 쏟아진 빛살이 바다와 산의 뒷면을 물들였다. 그래도 바닷가에서 산자락까지 조개껍데기처럼 자잘한 집들이 골목길들 사이로 다닥다닥 붙어 도시의 모양새를 이루고 있었다. 겨울의 세찬 바람이 불라 치라면 낡고 허접한 집들은 금방이라도 바다로 날아갈 듯 위태로웠다. 그러나 섬들로부터 몰려든 고깃배들과 새벽 어시장은 사람들로 왁자지껄했다.

그 도시는 역사를 비켜나가지 못한 슬픔을 지녔다. 수백 년 전 바다에서 장군에게 처참하게 침몰되었던 섬나라 침략자들은 그곳을 발판으로 강토에 발을 디뎠었다. 그렇지만, 바다에 연한 크고 작은 마을들은 위대한 장군의 역사와 신화를 넘나들었다. 적들을 공포로 떨게 했던 장군의 한이 서린 땅과 바다. 바다로 흘러오는 강물에 횟가루를 섞어 쌀 씻는 뜨물을 보여주고, 볏짚으로 휘감아 군량미로 착시했다는 노적봉. 바다와 뭍 어디든 죽음으로 지키려고 했던 백성과 땅이 오롯이 남아있었다. 극한상황을 이겨냈던 그 위대함은 지구별의 전사에 길이길이 남아있지만, 성웅에게 의 숫자는 큰 의미가 없다. , , , ~ 분노와 치욕까지 죽음으로 깊이 삼켜 의연한 북소리가 하늘과 바다를 울렸으리라는 것밖에는.

몇십 년 전까지 누에가 뽕잎을 먹듯 야금야금 갉아서 강탈한 쌀과 목화 따위의 물건들이 도시의 항구로 모아져 커다란 화물선들에 실리어 빠져나갔다. 도시는 침략자들이 물러간 후부터 차츰 퇴락했다. 한때 떼돈을 벌었던 상인들의 일부는 서울로 떠나고 일부는 도청이 있는 곳으로 옮겨갔다.

그가 미지에 대한 두려움으로 도시에 왔을 적에 이미 항구도시의 퇴락은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썰물이 물러간 갯벌에서는 갈매기들이 끼룩끼룩 울었으며 끈질기게 이어지는 사람들의 삶은 거칠었다. 무질서하게 생긴 뒷골목 길과 어둠침침한 극장들. 생선 비린내가 물씬 풍기는 부두의 어판장이며 철도역 후미진 골목을 점령하고 있는 사창가. 구불구불하고 긴 골목길의 밤은 시끄러웠다. 팔짱을 끼고 껌을 짝짝 씹으며 서성거리는 여인들이 불나비였으니까. 암석들로 이어져 실루엣으로 드러낸 산 아래에는 네온사인과 어둑한 조명이 뒤섞여 낡은 도시를 지켰다. 겨울이면 먼바다로부터 세찬 바람이 불어왔다. 그날을 벌어 하루를 먹고 사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내일이 막연했다. 그래서 분노였을까, 자학이었을까. 한밤중부터 새벽이 이울기 전까지 술에 취한 남정네들이나 아낙네들은 악다구니를 쓰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부두에서 노동으로 벌어먹는 이들은 힘든 삶에 끌려다녔다. 사소한 일에도 사람들은 분기탱천(憤氣撑天)했다. 휘발성이 강한 기름을 머금은 심지에 불꽃이 일 듯 입에 담지 못할 쌍욕부터 터져 나왔다. 암팡진 여인들은 분노의 감정이 폭발하면 상대방의 머리끄덩이를 잡거나 패대기쳐서 살집을 물고 뜯었다. (54쪽~55쪽)